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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 이름처럼 ‘믿음 경영’ 했더니… 하나님이 우뚝 세워주셨죠”
12. 2023

 


 

 

‘믿음의 기업’ 신원(信元)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73년 의류 수출을 중심으로 시작해 90년 국내시장에 진출,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을 사로잡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그 저변에는 박성철(83) 회장의 남다른 뚝심은 물론 깊은 신앙심이 있었다.


박 회장은 회사 창립 당시 하나님 앞에서 6가지 약속을 했다.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공예배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1년에 100명을 전도하겠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가난한 신학생 100명이 목사님 될 때까지 돕겠습니다’ ‘평생 100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겠습니다’는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믿음의 사람’ 박 회장을 13일 서울 마포구 신원 본사에서 만나 반세기 동안 기업을 이끌어온 소회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이명희 종교국장

-신원의 50번째 생일을 축하드린다. 직접 기업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일군 주인공으로서 소회가 각별할 것 같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일밖에는 없다. 50년이라고 하는데 사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의류 산업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작은 디자인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고 패션의 본 고장인 유럽에 수출했을 때는 각 나라와 경쟁을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수출을 하는 국내기업도 많고 우리나라 물건들이 전 세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50년 전만해도 미국 중심의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매우 어려웠다. 만약 다시 5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겠냐고 한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실 하나하나가 엮어져서 예쁜 옷이 만들어지듯이 모든 직원들과 협력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신원의 여정뿐만 아니라 회장님의 인생도 ‘역경의 열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하셨다고 들었다.
“전남 신안군 작은 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냥을 시작하며 집을 나왔다. 고아원에서도 생활했었는데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중앙국립감화원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곳은 소년원 같은 곳으로 갈 곳 없는 부랑아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한다고 하니 불량배들이 때리기도 하고 밤에 불을 꺼버리면서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정규 학업을 거쳐 한양대에 입학했다. 학비 마련을 위해 교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기자가 됐고 이후 눈여겨보던 섬유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

-신원이라는 기업 이름 자체가 ‘믿음을 으뜸으로’ 한다는 뜻이다. 해외에서 점차 법인 공장을 늘려가던 중에 공장마다 교회를 세운 것도 화제가 됐다. 전 세계에 공장이 세워질 때마다 그만큼 복음 전파에 대한 책임도 다한 셈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해외 4개국에서 월요일 아침마다 자발적인 예배로 일과를 시작한다. 예배 시간도 일과시간에 포함되는데 이런 문화를 처음 접한 타 회사 사람들이 ‘예배 드릴 시간에 일을 더하면 생산량이 더 많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오히려 일만 하는 다른 회사보다 생산량이 더 늘었다.

예배를 드리면서 직원들이 내가 다니는 회사에 대한 애사심도 더 생기고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일을 하니까 훨씬 효율이 좋다. 사회주의 국가나 이슬람 국가, 특히 북한 개성공단에 교회를 세웠을 때도 핍박과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대사회적 섬김을 열심히 한 덕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1990년에는 ‘베스띠벨리’ ‘씨’ ‘지이크’ 같은 젊은 감성의 의류를 국내에 론칭해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일은 쉽니다’는 광고 카피다. 신원의 트레이드마크였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이 문구를 쓰게 된 계기는. 

 


 

“해외 공장에 이어 국내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광고에 ‘교회 가세요’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을 돌려 한 것이 ‘주일은 쉽니다’였다. 돌이켜보면 이것보다 강한 임팩트를 주는 말이 없었던 것 같다. 50년을 이끌어 온 우리 기업의 슬로건이자 믿음이 없는 사람도 불편하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문구였던 것 같다. 이슬비에 옷 젖듯이 광고를 통해 조금씩이나마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모든 기업이 그랬겠지만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나.

“8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1600원대로 급등해 회사가 빌린 원금이 2배로 불어났고 이자율도 12%에서 36%까지 치솟았다. 1억5000만 달러가 넘는 외화 부채로 인해 ‘신원그룹은 재기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그동안 청지기 정신으로 믿음 경영을 하겠다는 다짐을 잊고 인간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회개도 하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집중만이 어려움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지혜를 주셨다. 당시 확장했던 16개 계열사 가운데 창업 모체인 섬유와 패션만 남기고 모든 걸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고 기도하지 않았다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2001년부터 이익이 나기 시작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5년 만인 2003년에 워크아웃 조기 졸업이라는 쾌거를 거뒀다.”

-35년 전 국민일보 창간 때 신원이 갖고 있던 당시 300억원대 여의도 부지를 쾌척하셨다. 현재 국민일보 명예회장이기도 한데 국민일보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자격이 없는 내가 명예회장까지 맡았다. 35년 전 조용기 목사님이 신문사를 만들어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이단과 맞서 싸우고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문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사옥을 지으려고 했던 여의도 부지를 양보하게 된 것이고 지금까지 후회는 없다. 국민일보가 복음실은 기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지금껏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단의 공격과 비기독교적인 문화가 확산될 텐데 한국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 역할을 국민일보가 해주길 바란다.”

-100년을 향한 신원의 청사진과 크리스천으로서 향후 비전이 궁금하다.

“한때 프랑스·이탈리아의 하청공장 역할에 불과했던 스페인이 정부의 지원으로 ‘자라’와 ‘망고’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것만 봐도 섬유·패션산업은 선망 사업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한국 섬유업은 기술 디자인 글로벌 파워 마케팅에 주력하면서 아프리카와 러시아 같은 새 시장을 개척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신원은 국내 패션업체 가운데 드물게 수출과 내수를 동시에 가동하고 있다. 앞으로도 두 시장을 상호보완하며 신원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한다.

나는 신원이 세계적인 회사로 뻗어나가도록 기도하고 있다. 세계적인 회사가 되면 해외선교를 더 활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공장을 계속 확대해 더 많은 직원들이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만나길 기도드린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케냐에 교회·신학대·우물을 만들게 해달라는 새로운 기도제목이 생겼다. 아프리카 대륙에 하나님을 전하는 일꾼들을 길러내 병마에 시달리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또 우물을 통해 깨끗하고 시원한 생수를 마시면서 그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나라의 생수를 깨닫게 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